2015년 6월 22일 Soultrain.com에 글을 기고하는 Stephen McMillan이 OG Skeeter Rabbit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입니다.[1]http://soultrain.com/2015/06/22/diary-of-an-ex-soul-train-dancer-the-original-skeeter-rabbit/ Lockerlegends에 글을 기고하며 올바른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Original Skeeter Rabbit의 인터뷰에는 춤에 대한 이야기 뿐이 아니라, 춤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그 역사에 대해서도 굉장히 깊은 고찰이 느껴집니다.
제임스 “스키터 래빗” 히긴스(James “Skeeter Rabbit” Higgins)는 남부 로스 엔젤레스 지역에서 가장 펑키한 댄서 중 한 명입니다. 그의 락킹과 로보팅, 그리고 트레이드 마크인 댄스 무브 ‘스키터 래빗’은 전설 그 자체지요.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가장 중요한 사명은 락킹 이면의 진실된 역사가 계속 전해지고, 또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락킹의 뿌리와 그 근간은 시민권 운동 시대에 태어났으며, 그 안에서의 우정과 형제애가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몇년여에 걸쳐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락킹 워크샵을 진행하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닉네임이 다른 이에게 가로채여져 쓰이고 있지만, 제임스 히긴스야말로 진짜 오리지널 “스키터 래빗”입니다.
당신을 춤에 끌어들인 계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전 제 인생 전반에 걸쳐 춤을 계속 봐왔어요. 제가 속하고, 또 자라온 문화의 한 부분이었죠. 제 어머니는 부엌에서 요리를 할 때면 KGFJ 라디오에서 DJ Magnificent Montague가 트는 모타운(Motown) 음악을 들으며 리듬을 타고 있었어요. 우리 집 전체가 다 그랬어요. 제 가장 처음 댄스 파트너는 제 어머니였죠. 어머니는 제게 the Stroll이나 the Madison 같은 춤들을 알려줬어요. 어머니에게 다른 자매는 없어서 어머니 친구분들이 제 이모나 다름없었는데, 그분들이 다 같이 어울려 놀면서 the Dog이나 the Shotgun 같은 춤을 같이 추곤 했었죠.
남부 로스엔젤레스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6번로와 센트럴(Central)가 교차로에서 자랐어요. KGFJ가 방송하던 Dolphin’s에서 두 블럭 떨어져있었죠. 매일마다 버스를 타고 Watts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로 등교하곤 했어요. 제 친구들의 대부분은 Watts와 남부 LA 출신이죠.
남부 로스 엔젤레스는 갱단의 활동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다는 것은 어떠했나요?
갱들은 우리 춤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저와 고고 브라더스의 버디와 토니 고고, 요요 브라더스와 코코까지, 어디를 가든 갱들은 우릴 보면 “저기 고고 브라더스다!” “쟤 요요 브라더스 멤버야!” 같은 말을 하곤 했었고, 덕분에 우리는 갱단과 엮이는 일은 없었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항상 이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하는데, 락커스가 자주 쓰던 모자들 있죠? 당시에는 크립스(Crips) 같은 갱들의 전유물이었어요. 그렉 캠벨락 주니어(Greg “Campbellock Jr.” Pope)나 샤바두(Shabba Doo), 다른 락커스 멤버들이 그 모자를 쓸 수 있었던 건 이미 길거리에서 고고 브라더스가 그 값을 지불했기 때문이에요. 다른 예로 그렉과 스쿠비 두(Jimmy “Scooby Doo” Foster)도 Watts Writers Workshop에 참여하면서 그 권리를 획득했죠.
스키터 래빗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겼나요?
제 닉네임과 동작의 이름은 정확히 같은 말이에요. 제 할머니가 말씀해주시길, 1955년 1월 21일에 제가 태어났고, 그 때 제 아버지가 병원 유리창 너머로 저를 보며 “스키터, 스키터, 스키터”하고 중얼거렸다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 했지만 제 아버지는 저를 계속 스키터라고 부르고, 결국은 지금까지도 제 닉네임으로 자리매김했죠. 스키터 래빗 동작은 제가 동네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보면서 시작됐어요. 아이들이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데, 리듬에 맞춰서 점프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당시에 제가 즐겨보던 니콜라스 브라더스(Nicholas Brothers)가 있었는데, 그들의 셔플 스텝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들은 마지막에 전통적인 셔플과 함께 팔을 뻗어내리는 동작으로 마무리를 지었죠. 락킹을 하게 되면서, 스쿠비 두가 자신만의 스텝을 락킹에 섞은 것처럼 저도 저만의 풋웍을 그 안에 담아냈어요. 동작들을 섞고 셔플을 하곤 했었죠. 그러다 어느 한 번은, 셔플로 동작을 마무리짓는 대신 계속 킥하고 스핀하고, 킥하고 스핀하고를 반복했어요. 그걸 보고는 그 자리에 있던 고고 브라더스의 버디와 토니 고고를 포함해 모두가 웃더라고요. 그러더니 나중에 the Citadel 클럽에 갔는데 그 둘이 “스킷, 그거 해봐, 너 하던 거” 하고 부추겨서 또 했죠. 그랬더니 뒤에서 프레드 베리(Fred Berry; Penguin)가 웃으면서 말하길 “스키터, 너 하는 거 무슨 토끼(rabbit) 같아. 스키터 래빗이다, 너.” 하는 거예요. 그리고 스키터 래빗이라는 이름은 그 동작의 이름이 되었고, 또 제 풀 닉네임이 되었죠.
Electric Boogaloos에도 스키터 래빗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댄서가 있었는데요?
스키터 래빗이라는 이름은 단 하나 뿐이에요. 55년에 제가 태어나면서 생긴 이름이고, 래빗은 나중에 제 춤에 의해 붙었죠. 2004년경 일본에서 Electric Boogaloos의 멋진 댄서, 스티븐 니콜스(Steven Nichols), 또다른 스키터 래빗을 만났어요. 앉아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먼저 말하길 “스킷, 당신을 디스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전 당신이 노란색 쉐보레를 타고 110가와 브로드웨이(Broadway) 교차로로 가서는 마당에서 춤추는 걸 봐왔어요.” 하더군요. 사실이었어요, 당시에 제 여자친구가 거기에 살고 있었고, 앞마당에서 춤추고 있노라면 동네의 아이들이 와서는 구경하곤 했었죠. 그리고 그가 이어 “제가 할 줄 아는건 스키터 래빗밖에 없었어요. 제가 그것만 하다보니 사람들이 저를 리틀 스키터 래빗(Little Skeeter Rabbit)이라고 부르더라고요.”라고 하며, 또 당시에는 클럽 주변에서 놀기는 했지만 미성년자여서 클럽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고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그렉과 토니 바질(Toni Basil)이 클럽에 들어가려다 자신을 보고는 손목을 붙잡고 들어가며 “얘 스키터 래빗이야”라고 했다더군요. 클럽 관리인이 정말 저라고 생각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때부터 한명두명 그를 스키터 래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당신들이 생각하는 오리지널 스키터 래빗이 아니라고 해명을 했지만, 사람들은 그저 계속 스키터 래빗이라고 그를 불렀죠. 그가 사실을 이야기해줘서, 그와는 그 이상 문제 삼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저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 저를 아는 사람들은 스티븐이 제 이름을 걸고 금자탑을 쌓아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에요. 그 자신에게도, 흑인 사회와 역사에도 그건 치명적인 행동이에요. 만약 제가 저를 돈 캠벨(Don Campbell)이라고 칭했다면 어땠을까요? 온갖 분노에 찬 욕설과 일들이 이어졌겠죠. 한동안 저도 그런 식이었어요. 하지만 스티븐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도록 둔 환경이 너무 싫었어요.
소울 트레인 댄서로 합류하기 전에, 당신은 캠벨락 주니어, 스쿠비 두, 고고 브라더스 등과 함께 Watts Writers Workshop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요.
네. Watts Writers Workshop은 65년에 있었던 왓츠 폭동 사건 이후 66년부터 이어져왔어요. 작가도 있었고, 밴드도 있었고 심지어 레코딩 스튜디오도 있었죠. 우리는 거기서 71년인가, 72년에 댄스 클래스를 진행했었어요.
어떤 경위로 Watts Writers Workshop에 합류하게 되었나요?
고고 브라더스(토니, 버디)는 Free Expressions라는 아카펠라 그룹의 일부로 학교와 학교를 다니며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제가 그들과 같이 투어를 할 수 있게 허락해줬고 우리는 동네의 모든 고등학교 무대에서 락킹과 로보팅을 비롯한 춤 단막을 선보였죠. 그러면서 고등학교 춤 씬이나 호텔 등지에서 저희의 유명세가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Watts Writers Workshop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당시 명망있는 댄서였고 또한 제가 살면서 본 중 가장 뛰어난 락커 중 하나였던 아네타 존슨(Arnetta Johnson; Netta Bug)의 삼촌이 거기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그가 우리에게 그 춤을 워크샵으로 가져올 수 있겠냐고 물어왔죠. 우리는 그 곳에서 크루를 꾸렸어요. 저와 고고 브라더스, 그리고 아네타 존슨과 후에 the Ikketes의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추는 로나 듄(Lorna Dune), 그렉의 여자친구였던 셸리 자파타(Shelley Zapata) 세 명으로 이루어진 투타-우타 시스터즈(Toota Woota Sisters), 프레디 맥시(Freddie Maxie), 그렉과 스쿠비 두까지, 우리는 그룹에 크리에이티브 제너레이션(Creative Generation)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Watts Writers Workshop에 참여한 아이들에게 이 스타일은 어떻게 추는 것인지 알려주고, 그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일했어요.
그 모든 인원이 워크샵에서 락킹과 로보팅을 가르치고, 또 각지에서 공연을 해나간거군요?
네. 우리는 서부를 오르내리며 대학 축제 무대에 올랐어요. 가끔은 학교도 결석하고, 전 심지어 야구 훈련도 불참했었어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Cal State)나 버클리(UC Berkeley) 등에서 락킹으로만 이루어진 무대를 선보였었죠. 이건 락커스(the Lockers)가 결성되기 전 이야기예요.
파티 스타일 댄서에서 락커 스타일 댄서로 전향하게 된 시기가 있었을텐데요?
네. 고고 브라더스 멤버였던 버디 고고네 근처에 찰스 워싱턴(Charles Washington)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훗날 Captain Crunch and the Funky Bunch의 찰스 워싱턴이 아니라, 파티 스타일 로봇의 선구자와도 같은 분이죠. 제가 본 길거리에서 마네퀸이나 기계인간 흉내가 아닌 춤으로서의 로봇을 파티에서 여성과 함께 추는 최초의 댄서였어요. 그를 보러 그의 집 앞마당으로 가곤 하면 그가 이런 춤을 추려면 어느 클럽에 가야한다는 식으로 알려주었죠. 저와 버디, 토니 고고, 그리고 케빈 요요(Kevin Yo-Yo)는 the Citadel 클럽으로 향했고 거기서 그렉과 플루키 루크(Fluky Luke), 프레디 베리 등을 만났죠. 스키터라는 이름에 래빗이 붙은 것도 거기였고요.
소울 트레인 댄서가 된 경위는 어떻게 되나요?
the Citadel에서의 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시카고에서 옮겨오는 소울 트레인이라는 쇼에 대한 소식을 접했어요. 그리고 오디션을 열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저는 첫 시즌 오디션 때는 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소울 트레인이 첫 방영을 시작하자, 우리가 그 클럽에서 봤던 사람들인데 어느새 너무나 유명해진 걸 보고 저도 덴커 공원(Denker Park)에서 예정된 두 번째 시즌 오디션을 기다렸죠. 쇼의 댄스 담당자였던 팸 브라운(Pam Brown)이 딕 그리피(Dick Griffey)와 함께 있었어요. 운동장의 끝에서 끝까지, 제가 본 가장 긴 소울 트레인 라인이 형성되었죠. 팸과 딕은 라인의 끝에 서서 린 콜린스(Lyn Collins)의 Think를 반복해서 틀었어요. 그 노래에 맞춰 라인을 20번 정도 가로질러야 했어요! 팸 브라운이 저와 제 파트너 캔디 분(Candi Boon), 그리고 게리 터너(Gerri Turner)를 불러 다음 쇼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겠다고 했죠. 사실 전 돈 캠벨과 그렉이 자기들이 펜스를 넘겨서든 문을 열어주든 어떻게 해서든 저희를 들여보내주겠다고 해서 상관없었는데, 그래도 팸 브라운이 제 이름을 리스트에 올렸으니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죠.
소울 트레인에서 보냈던 첫 번째 주말이 혹시 기억나시나요?
쇼가 원래는 KTTV에서 녹화하곤 했는데, 시즌2 시작할 시기에는 KTTV에서 녹화하지 않았어요. 노동조합에 관련된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문제가 생겨서 ABC TV의 스튜디오를 빌려 녹화를 했었죠.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가장 즐겁게 본 소울 트레인에서 공연한 아티스트는 누가 있을까요?
가장 기억나는 건 역시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네요. 그 자리에 있었던 기억은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소울 트레인에서 많은 무대들이 립싱크 무대였어요. 제임스 브라운이 도착하자 립싱크 여부에 대해서 대화가 오갔는데, 녹화가 지연될 정도였죠. 하지만 결국 그는 무대에서 라이브로 진행했어요. 음악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져, 심지어는 휴식시간에마저 끊이지 않았죠. 제임스 브라운은 그의 밴드 The J.B.’s를 데려와서는 우리를 위해 계속 연주를 이어가도록 했어요.
혹시 제임스 브라운과 대면하거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나요?
한 번 무대 앞에서 그의 바로 옆에 서게 되었는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이내 그가 말하더군요. “야, 너네 댄서들, 너네들 정말 죽여준다. 너희들만의 뭔가가 있어.”
몇 년 후 제가 소울 트레인 댄서가 되었을 때, 쇼에서는 락킹과 로보팅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느껴졌었어요. 당신도 지난 번에 제게 그걸 느꼈다고 말했었죠?
네, 그럼요. 시즌 2에 합류했을 때 돈 캠벨과 찰스 워싱턴, 그리고 다른 몇몇 락킹 댄서들은 이미 유명해져있었어요. 돈과 다른 시즌 1 댄서들과 나눈 대화 내용으로는 당시 돈 캠벨은 유명세를 얻었고, 자신의 춤에 대한 보수를 요구했어요. 그러자 돈 코넬리우스(Don Cornelius)는 그를 쇼에서 내쳤죠. 그리고 락킹 댄서들이 더 이상 유명세를 얻지 못하도록 하려고 그들을 무대 바깥쪽에 자리하게 해 카메라가 그들을 직접 비추는 일이 없도록 했죠. 어떤 때에는 댄서들은 락킹을 그만 하라는 지시도 받았고, 소울 트레인 라인에서 락킹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일 등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미 락킹은 너무나도 유명해졌고, 그 모든 카메라에서 지워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댄서들이 많았죠. 결국 훗날 돈 캠벨은 락커스로 소울 트레인에 돌아와 무대를 선보였고, 돈 코넬리우스는 웃으며 자신이 돈 캠벨을 쇼에서 쫓아냈던 일에 대해 언급했죠. 아시겠지만, American Bandstand가 락킹과 로보팅 댄서들을 고용하다시피 하면서 경쟁 구도를 만드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었기도 하고요.
70년대 American Bandstand의 몇몇 에피소드에서 백인 소년 소녀에게 락커 스타일의 복장을 입히고 그들 나름대로의 락킹을 흉내내는 걸 본 기억이 나네요. 너무 가짜 티가 나긴 했지만요.
진짜가 아니었으니까요.
혹시 딕 클라크(Dick Clark)가 소울 트레인에 대항해 운영했던 흑인 댄스 쇼 Soul Unlimited에도 출연했었나요?
그 쇼에는 간 적이 없어요. American Bandstand에는 한 번 갔었네요. 그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울 트레인에서 본 것을 따라하느라 바빴어요. 락킹과 로보팅이 그만큼 유명해졌었거든요. American Bandstand는 펑크(funk)와 소울(soul)만의 느낌이 없었어요. 제가 자라던 60년대에 American Bandstand는 쇼에 오는 흑인 아티스트를 위해서 일부러 청중 속에 흑인 커플 한 둘을 넣는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어요. 듣기로는 그 두 커플은 심지어 같이 춤추지도 못 하고 떨어져 있어야 했다고 하더군요.
다른 댄서들이 말하길 돈 코넬리우스가 댄서들에게 Soul Unlimited나 American Bandstand에서 춤 추는 것에 대해 경고를 날렸다고도 하던데요.
맞아요. 만약 그 쇼에 나가게 되면, 소울 트레인에서는 다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니 선택을 해야 했죠.
소울 트레인에서의 경험을 요약하자면 어떤가요?
소울 트레인과 함께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죠. 72년부터 73년, 그리고 74년 잠시까지. 어떤 때는 심지어 카메라에 잡히는 건 생각도 안 하고 무대 옆편이나 바깥쪽에 서서 그냥 재밌게 놀기도 했어요. 종종 카메라에 잡히기도 하곤 했는데, 전 딱히 카메라 중독자나 소울 트레인 라인에 서야겠다 하는 생각은 없었어요. 제게 가장 중요했던 건 즐겁게 춤추는 것, 춤추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아티스트를 보는 것이었어요. 화면에 잡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였죠. 제 어머니가 소울 트레인을 보다가 “스킷 저기 있다!” 하는 걸 보면 그런 것도 좋지만, 제 목표는 아니었어요. 소울 트레인 녹화를 마치고 나면 저와 다른 댄서들은 Maverick’s Flat, the Summit, the Citadel 같은 클럽에 가서 또 밤새 춤을 추곤 했죠.
댄서들이면 다들 제공되던 프라이드 치킨만을 보며 춤을 추곤 했었죠!
그렇죠! Golden Bird 치킨에서 수많은 박스를 가져오곤 했었죠. Golden Bird는 흑인이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3, 4년 전에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식당 중 하나예요.
다른 댄서들이 말하길 세트장에서 말싸움이나 심지어는 실제 싸움도 벌어진 적이 있다고 하던데요.
누가 화장실에서 먼저 옷을 갈아입을거냐 같은 거로 싸움이 붙곤 했어요. 그 때는 두 번의 쇼를 위해 두 개의 옷을 가져가야 했거든요. 심지어 댄스 플로어에서 로봇 배틀이 벌어지는 걸 본 적도 있어요. 로스 엔젤레스의 공공주택 지역 출신으로 코코 브라더스의 한 명이던 비숍 코코(Bishop CoCo)는 저와 오키도크(Oke-E-Doke)와 함께 자라면서 춤을 춰왔었는데, 슬림 더 로봇(Slim the Robot)과 가벼운 말싸움이 벌어지다가 녹화와 녹화 사이에 로봇 배틀을 했었죠.
락커스 그룹의 멤버였던 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74년 봄에 있었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투어 때 함께 했어요. 뒷배경이 좀 있는데,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 TV에서 그렉과 저희가 락킹을 하는걸 봤다고, Creative Generation이냐고 하길래 그건 우리가 아니라고 했어요. 다음 주말에 Maverick’s에 가서, 그제서야 그렉에게서 Roberta Flack TV 스페셜에서 캠벨락 댄서즈(Campbellock Dancers)가 출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그래서 저는 그렉에게 새 크루가 생긴거냐, 아니면 Creative Generation과 계속 함께 하냐 물었죠. 또 왜 돈, 플루키, 다른 사람들과 함께 TV에 나온다고 저와 토니, 버디에게 이야기 안 했냐고도 물었고요. 그렉이 말하길, “걱정마, 스킷. 우리가 캠벨락 댄서즈라는 그룹을 만들었는데 모두 같이 하게 될 거야.”라고 하더군요. 덧붙여 토니와 저는 대학에 다니고 있어서 대체자로 보고 있다고도 했어요. 그리고 약 다섯 달이 지나 74년 봄, 그렉과 토니 바질이 전화해서 제게 말했죠. “스킷, 뉴욕으로 올 준비 됐지? 그룹에 합류할 때야. 와서 로봇 무대랑 다른 것들 해줘야 해.”
이 때 당신은 롱비치 주립대학(Long Beach State College)에 야구 장학생으로 있었죠. 당신의 어머니는 뉴욕으로 가서 무대에 오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엄청 화나셨어요. “스킷, 이렇게 학교도, 장학금도 버리고 더 이상의 교육을 거부한 채 그냥 그렇게 갈거야?” 하지만 이런 기회는 자주 있는 게 아니죠. 전문적인 댄스 그룹에 속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어요. 그 전에는 아예 없던 것이었고요. 그래서 전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떠났죠. 조명 달린 의상도 입어야 해서 그 전에 Maverick’s에서 입어보기도 했어요.
그때의 일은 어땠나요?
뉴욕의 카네기 홀(Carnegie Hall)에서의 공연이 바로 제가 첫 번째로 오른 프로페셔널한 무대였어요. 프랭크 시나트라 투어의 전체에 걸쳐 제가 로봇을 담당하게 되었죠. West Side Story 무대에서 저는 로봇을 맡았는데, 갱들에게 두들겨 맞아 플로어에 누워있다가, Deodato의 2000에 맞춰 로봇처럼 무대에서 내려왔어요. 내려오면서 오페라 좌석을 봤는데 루실 볼(Lucille Ball)이 있더라구요. 그녀와 프랭크 시나트라, 그리고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Sammy Davis Jr.)를 만나봤어요.
투어가 얼마나 길었나요?
몇 달에 걸쳐서 진행되었어요. 투어를 마치고 저는 로스 엔젤레스로 돌아왔죠. 전 대체자 역의 멤버여서 그들과 같이 일하고 같이 연습했고, 또 투어를 하면서 계약서를 작성해야 했지만 작성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세금 계산을 할 때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또 가족들은 제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매우 실망스러워했죠. ICM이나 락커스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던 이 사건은 제게 있어 많은 상황을 바꾸어 놓았고, 또 저로 하여금 다른 일을 찾게 하였죠.
그럼 그 후에는 어느 직종에 종사했나요?
Cher 쇼에서 시즌 일부에 댄서로 참여했어요. 다미타 조 프리먼(Damita Jo Freeman)이 연결시켜줬죠. 당시 저는 락커스와의 활동이 아예 계약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매우 실망해있었어요. 락커스와 함께 하기 위해 야구 장학생도 포기했는데, 이제는 이걸 위해서 학교까지 떠났냐는 가족으로부터의 압박감에 시달렸고요. 결국 늦은 시점에 군대에 지원을 했는데, 다미타가 제게 전화를 걸어 CBS TV에 오디션이 있고 이름을 올려놨으니 가보라고 하더군요. CBS Radio와 헷갈려서 조금 늦긴 했는데 다행히 오디션에는 참석했고,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미 저를 알고 있더라구요. 저는 Lionel Douglas (Big B), Deney Terrio와 함께 Cher 쇼의 댄서로 합류했고, 또 다른 백인 댄서들 몇몇이 있었어요. 이런 댄스 스타일을 어떻게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보자면 원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어요. 우린 그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Cher의 노래 몇몇에 펑키한 스트릿 댄스 스타일을 접목하기도 했어요.
군대에 지원을 이미 했는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나요?
공군 지원 프로그램이 딜레이가 되는 덕분에 입대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담당 장교가 Cher 쇼의 팬이었는데, 그에게 지금 Cher 쇼와 막 계약을 마친 상태라고 설명을 하였고 그가 입대 취소를 도와줬죠.
Cher와 일하는건 어땠나요?
그야말로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기억에 깊이 남는 분이죠. 둘 다 이 뭐라 형용하기 힘든 아우라를 가지고 있고, 또 제가 다른 종류의 음악, 그리고 다른 종류의 재능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줬어요. 만약 흑인 문화권인 동네에서 자랐다면 그건 곧 펑크와 소울 음악만 듣고 다른 음악이나 다른 재능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안 쓴다는 의미예요. 프랭크 시나트라를 예로 들자면, 그는 막 입장만 하더라도 사람들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는 그런 힘이 있어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이죠. 그게 바로 그가 가진 힘이에요. 셰어(Cher)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어떤 동작을 먼저 보여주고, 안무가가 그 동작을 재즈 무브로 변형시켜놓으면, 그녀는 그걸 어느순간 우리 스타일의 춤으로 다시 재해석하더군요. 정말 대단했어요.
이후에도 투어 활동을 이어갔나요?
Cher 쇼에서 저는 유타(Utah) 주에서 온, 제가 본 춤추는 백인 중 가장 펑키한 캠 워커(Cam Walker)를 만났어요. 그는 이 춤의 스타일을 배우고 싶어하는 만큼이나 그 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했죠. 그가 제게 말하길, “이봐 스킷, 이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진짜 그룹을 같이 만들어보자. 그 동네에서 락커스가 아니었거나 아니면 다른 동네 사람들은 잘 모르는 댄서들 혹시 알아?”라고 해서, “그럼, 한참동안 나랑 같이 춤추던 친구들이 많이 있지.” 했어요. 그가 제게 그룹을 같이 조직하자고 제의했고, 우리는 33RPM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남부 LA를 대표하는 마이클 “피카부” 프랭키(Michael Peek-a-Boo Frankie)도 데려왔고, 로봇 댄서이면서 동시에 락커인 존 “오키도크”(John Oke-e-Doke)도 데려오고, 다른 친구들도 많이 합류했어요. 다들 소울 트레인의 에피소드 전반에 걸쳐 모습을 드러냈던 친구들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팀을 만들었고, 캠이 우리를 시드와 마티 크로프트(Sid and Marty Krofft)에게 데려갔어요. H.R.Pufnstuf라는 TV쇼로 유명한 인형술사들이었는데, 막 조지아(Georgia) 주 애틀랜타(Atlanta)에 실내 놀이공원을 연 참이었죠. 그렇게 33RPM을 75년부터 76년까지 애틀랜타를 중심으로 남부 투어를 보냈죠.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다른 TV 출연은 더 없었나요?
33RPM으로 할렘 글로브트로터즈(Harlem Globetrotters; 프리스타일 농구팀)의 TV스페셜 무대에 올랐었어요. 호텔의 아래쪽에 아이스스케이트 링크가 있었는데, 글로브트로터즈가 농구 공연을 선보이고, 저희는 하프타임에 공연했어요. 또 유타 주를 돌아다니기도 했었는데, 정말 많은 경험을 했죠. 흑인이 인정받기 어려운 동네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우리 춤을 좋아해줬어요. 이 때에는 정말 많은, 그리고 좋은 일들이 있었죠.
80년대에는 엔터테인먼트에 관련된 일은 안 하셨나요?
비디오가 나오던 시기에 저는 그 쪽에서 손을 뗐어요. 일찍이 헐리우드 씬에 대한 기대를 접어놓아서, 새롭게 태어나는 씬이었지만 제게 별 흥미를 끌지는 못 했어요. 저는 형사가 되었고, 또 Skeet’s Hare Needs라는 미용품 가게도 열었어요. 4개의 가게를 동시에 운영하던 때도 있었구요. 또 중앙 버논 상인 연합회(Vernon Central Merchants Association)와 T.A.G(Teens Against Gangs; 갱들에 대항하는 십대)라는 단체의 회장을 맡기도 했고요. 남부 LA와 왓츠(Watts)에 제 뿌리가 있었고, 그곳에 계속 머무른거죠.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네요! 형사로서의 생활은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요.
사실 좀 버거운 일이기도 했어요. 스트릿 댄스의 기원은 말하자면 60년대에 억압받던 흑인들에게서 시작된 것이거든요. Watts 폭동 사건은 경찰들의 무자비한 탄압에서 시작됐었어요. 저도 경찰 폭력의 희생자였던 적이 있었구요. 저는 흑인 인권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자랐는데,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움직임에 더 가까웠죠. 락킹이 생기기 이전부터 누군가를 가리킨다던가(포인트), 혼자 하이파이브하거나 핸드셰이크 등의 제스쳐를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시기에 자란 거예요. 처음에는 교통 경찰 조사관으로 합류해 아이들을 찾거나 하는 일을 했지만 형사 행정학 학위를 받으면서 지역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형사가 되었죠. 그 때는 사회에 기여하고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트레이닝과 온갖 경험을 겪은 착한 경찰이 되어야 한다는 걸 몰랐어요. 그래서 저는 더 가까이 다가가고 또 사람들을 돕고 싶었지만 경찰이 폭력을 휘두르는 걸 보았을 때는 그만 둘 생각도 했었어요. 집에 와서 생각을 정리하고 부인에게 이야기했더니, 만약 제가 지금 떠난다면 다른 어린 흑인들이 필요로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을 도와줄 이도 없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선례를 만들 기회조차 사라진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저는 이러한 움직임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제가 가르칠 때 몇몇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 이 춤이 진정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것은 축복이며 동시에 저주라고 해요.
꽤 오랫동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락킹을 가르치고 계신데요.
지난 8-10년동안 전세계를 여행하며 워크샵을 가르쳤어요. 우리가 했던 것, 그리고 소울 트레인이 뭔지, 락킹이 뭔지,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나 춤 그 이상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어요. 그걸 통해서 간극에 다리를 놓아 하나로 뭉칠 수 있고, 춤으로 이어지는 대화의 장을 열 수 있지요. 이 춤, 이 움직임은 변화를 위한 것이었어요.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이 사회의 내부에서는 춤으로 화합의 장을 열었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춤이 어디서 왔는지는 보지 못 하고 있죠. 단지 소울 트레인이나 Carol Burnett, Doris Day를 비롯한 TV에서 봤을 뿐이에요. 춤 추는 장면을 보고 있지만, 스트릿 댄스의 뿌리와 그 근간은 보지 못 하는 거예요. 그들이 소울 트레인 녹화가 끝난 뒤의 클럽을 봤나요? 공원에 모여, 그야말로 춤 추기 위해 춤을 추는 모습을 봤을까요? 그 사람들이 본 것은 쇼일 뿐이에요. 저는 만약 진짜 펑크와 소울을 느끼고 싶다면 그 음악에 솔직해지고, 진중해지고, 또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만약 그 음악,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그저 펑크와 소울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죠.
맞는 말씀입니다. 락킹의 역사를 모르는 이들에게 락킹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죠. 그것이 없지는 않을지언정, 그 뒤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당신과 고고/요요/코코, 스쿠비 두, Creative Generation, 더 락커스, 이 모두가 그 뿌리지요. 80년대의 브레이킹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죠. 포인트에도, 핸드셰이크에도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겪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죠.
아무래도 중세시대부터 내려온 클래식 같은게 아니다보니 이에 대해 낯부끄러운 일도 많아요. 어떤 사람들은 이 스타일의 춤을 보면서 그 예술 형태를 보지 못 하고, 또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의 어떠한 사람들이 해왔는지 같은 역사를 이해하지 못 해요. 그러면 마치 단순히 어떤 모자를 어떻게 쓴다던가 하는, 단순히 그 스타일을 흉내낼 뿐인거죠. 프랑스에서 대회 예선 중에 한 댄서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가발을 쓰고 망토에 기타까지 등에 맨 채 나와서 포인트에 이리저리 흔들고 기타도 던지고 지금 음악을 연주하는 마냥 흉내내다가 멈추고 하더라구요. 예선에서 탈락하자 제게 와서 물어보며 ‘락킹은 창의성에 기반한다’고 하더군요. 락킹 자세를 잡았으니 락킹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그에게 락킹은 시민권 운동이 일던 시기 길거리에서 태어난 문화이며, 어떠한 것들은 변하지 않고 지켜져야 한다고 설명해야 했어요.
제 경우는 로보팅에 깊게 빠져있어요. 로봇을 할 때면 마치 다른 영역으로 진입하는 느낌이죠.
미리 만들어진 로봇 음악 말고, 예를 들어 파티에 가서 파티 음악, Chi-Lites의 “For God’s Sake, Give More Power to the People” 같은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에 빠져들어서는 그 음악의 악기, 로봇이라는 악기가 되는 거죠. 노래의 가사와 그 음악에 담겨진 작곡가의 감정들을 로봇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바로 그래서 90년대 후반, 2000년대 소울트레인에서 댄스 담당자가 저한테 락킹과 로보팅 좀 그만 하라고 할 때 굉장히 짜증났었거든요. 이 춤들은 지금도 계속 사람들이 추고 있고, 해외에서도 가르치고 있고, 마이클 잭슨이나 어셔(Usher)도 안무에 이 춤들을 녹여내고 있는데도 말이죠. 나중에는 저를 소울 트레인 라인 끝에 세워두거나, 아예 라인에 세우지를 않더라구요.
그게 바로 저한테는 락킹과 팝핑이 동의어인 이유예요. 이 춤들은 아프리칸-아메리칸 문화의 예술 형태로 생각되어야 해요. 익히 알고 계시듯이, 소울 트레인의 황혼기에는 우리들의 진짜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는, 자기 혐오가 존재했었어요. 당신이 했던 일은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죠.
말씀 고맙습니다. 제가 소울 트레인에 있을 때는 시대가 달랐어요. 돈 코넬리우스의 모티브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80년대 후반부터 프로그램 종영까지의 소울 트레인을 보면 쇼의 포커스는 여자아이들이 귀여움 떨고, 춤은 안 추고 이리저리 흔들기만 하는 거였어요. 저는 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지만, 이미 이전의 쇼가 아니었어요. 다른 친구들 하는 것 좀 보고 배우라고 하길래 저는 저라고 말했었어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이 있어요. 언제든 무엇인가가 굉장히 영향력을 얻게 되면, 누군가가 그것의 의의를 배제하고 엔터테인먼트로써의 것만 남겨놓고는 사람들이 그 것의 본질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죠.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아프로 중심의 운동권의 영향이 강해지자 이를 희석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우리들이 아프리칸-아메리칸으로서 시민권 운동을 통해 많은 혜택을 얻었다는 식이었죠. 예를 들면 EOP(Educational Opportunity Program; 저소득층/비고등교육층 대상의 교육 지원 프로그램)라던가, 각종 장학금, 그리고 고용개선조치 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어요. 그러기 위해서 음악에서 그 본질을 배제하기 시작했고, 디스코가 나왔죠.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의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처럼 말이죠.
사실 존 트라볼타가 댄스 아카데미에서 33RPM 바로 다음에 연습을 했었어요. 캠 워커가 드니 테리오(Deney Terio)를 알고 있었는데, 댄스 컨테스트가 있을때면 와서는 앉아서 구경하면서 돈 캠벨이나, 저, 그렉, 스쿠비 두나 알파 오메가 앤더슨(Alpha Omega Anderson)을 보곤 했었다더군요. 우리가 춤추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본 뒤에는 존 트라볼타를 훈련시키는 거예요. 다만 락킹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손목을 돌리는 걸 “supper supper”(supper; 저녁 식사, 만찬)라고 하거나, 자기 페이스를 조절하는 걸 “punch punch”라고 하거나 하면서 존 트라볼타에게 “supper supper”를 가르치는데 마치 양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처럼 흉내냈어요.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그가 락킹을 흉내내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죠. 춤에서 그 본질과 동작을 다 빼버리고는 하나의 디스코 댄스로 만들어버리고, 또 그 본질이 시작된 곳과는 상관없이 무대를 옮겼죠. 하지만 끓는 주전자에서 물이 끓어 넘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맞습니다. 이 시기는 브레이킹과 힙합이 브롱스(Bronx)에서 시작된 시기이기도 한데요.
같은 문제가 동부의 힙합에서도 발생하였죠. 힙합은 길거리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마찬가지로 주전자는 끓다못해 넘쳐 흘렀죠. 하지만 당시 동부의 친구들은 현명하게도 이것에 “힙합”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많은 이들이 그 본질을 흐려놓으려고 했지만, 진짜 형제 자매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어요. 락킹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을 찾아볼 수 있어요. 많은 2세대, 3세대 댄서들이 TV에서 본 춤을 따라 추며 시작했어요. 그 태동의 시기를 지나 나타난 친구들이 스스로를 기본에 충실한 오리지널이라고 칭하고 다녔죠.
이 모든 이야기는 분노와, 또 자긍심으로 가득찼던 시민권 운동으로 그 타래가 엮입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풍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슬프게도 제가 소울 트레인에 있을 때는 그를 흐려놓으려 하고 있었어요. 전세계에 걸쳐 팝핑, 로보팅, 락킹 등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냥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볼 법도 했는데, 사실은 그 시기와도 상관없이, 영원히 남을 것만 같네요.
여행을 이어가면서 제가 가장 놀란 것 중 하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락킹의 역사와 그 본질에 대해 알고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춤은 우리 역사에서 노예로 지내던 시기부터 항상 정신적인 기둥이 되어왔어요. 전세계의 친구들이 이 정신적인 뿌리를 찾고, 또 어디서 왔는지, 그 과정에서의 분쟁과 고통에 대해서 알고 싶어해요. 왜냐하면 지금도 전 세계가 고통에 시름하고 있거든요. 스웨덴은 우리의 이러한 움직임에 가장 크고 또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데, 단순히 락킹을 댄스 스타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공부하고 이해하려 하고 있어요. 많은 친구들이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춤을 배워가고 있죠. 저는 보다 접근성이 좋은 교육 시설이 생겨서 이런 재능 있는 친구들이 돈에 구애받지 않고, 또 정부의 간섭도 없이 그들의 뿌리와 물려받은 유산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있어요. 일본과 중국의 예를 들자면, 정부가 문화 교류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지만 미국은 우리의 문화 유산의 가치를 높이 사지 못하고 있어요. 스택스(Stax) 레코드 사의 사장인 알 벨(Al Bell)이 왓스택스(Wattstax; Watts 폭동으로 상처입은 지역 사회를 위해 Stax 사에서 연 자선 콘서트)의 극장 상영 영상에 그렉과 플루키의 핸드셰이크를 포함시켰던 이유에 대해서 말해줬는데, 그의 말을 빌리자면 “시각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그 모든 운동과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온 거예요.
몇몇 사람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가지고는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고 합니다.
저와 스쿠비를 만난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자신이 모든 걸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생이라며 이 춤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죠. 전 가르칠 때 사람들에게 펑크와 소울은 살 수도, 팔릴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곤 해요. 이건 자신의 안에서부터 나와야 하는 거예요. 창의적인 힘이 우리의 영혼(soul) 안에 있고, 펑크는 그 소울을 쏟아내는 땀인 거예요. 이렇게 소울을 쏟아내려면 당신의 높은 자존심에 귀기울이지 말고, 당신의 소울 자체에 귀기울여야 해요. 말하자면 교회를 가는 것과 같은 거예요. 만약 그들이 정말 우리가 지나온 시대의 펑크와 소울을 느끼고 싶다면, 먼저 음악을 받아들이고, 그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뒤에야 진짜 펑크와 소울을 느낄 수 있는 거예요. 만약 그러지 못하겠다면, 미안하지만 그들은 느끼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척 할 뿐이에요.
말씀을 들으니 흑인들의 문화나 겪어온 일들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우리가 쓰는 말을 흉내내면서 힙한 척 섞여들려는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저 모든 걸 이해하고 경험해야 하는데 말이죠.
제임스 브라운이 소울 트레인에 나왔을 때의 에피소드에서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자신의 음악이나 음반 판매량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는 흑인들이 다니는 대학의 교육 수준이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그는 흑인 교육을 더 낫게 만들고자 대리인을 자처했죠. 소울 트레인 초기의 스크램블 보드 코너(무작위로 흩어진 알파벳을 조합해 이름을 맞추는 코너)를 보면 흑인 엔터테이너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Harriett Tubman 같은 흑인 역사에 관한 것이 정답인 때도 있었어요. 프레데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의 아프로-쉰(Afro-Sheen) 광고는 우리의 헤어스타일에 대한 흑인들의 자부심을 보여준 예예요. 만약 소울 트레인, 락킹, 그리고 스트릿 댄스가 던진 문화적 충격이 의미하는 바를 가르치길 기피한다면, 그건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죠.
돈 코넬리우스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단순한 프로듀서나 TV쇼의 호스트를 넘어, 한 세대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고 또 그들의 지지에 보답하고자 자신을 헌신해가며 춤을 통한 하나의 연결고리를 더욱 견고히 한 점을 더욱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소울 트레인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며 주먹을 높이 들고 “love, peace and soul”을 외치는 모습은 우리의 뿌리와의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지요. 그의 프로그램은 오늘날 여러분이 보는 힙합을 있도록 한 문을 연 기념비적인 프로그램입니다.
각주
↑1 | http://soultrain.com/2015/06/22/diary-of-an-ex-soul-train-dancer-the-original-skeeter-rabb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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