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Brown

James Brown Split

James Brown Split

1933년, South Carolina 주의 Barnwell에서 태어난 James Joseph Brown은 흔히 ‘소울의 대부(the godfather of soul)’이라 칭송받는, 전설 그 자체인 뮤지션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실 그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그의 이름을 Joseph James Brown Jr.으로 지었으나 출생 신고 과정에서 착오가 있어 이름(first name)과 중간 이름(middle name)이 바뀌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James Brown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프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를 Joseph Brown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이름 뒤의 Jr. 또한 남아있었을 수도 있습니다(아버지의 이름이 Joseph Gardner Brown입니다).

4살 무렵 Georgia 주 Augusta에 살고 있던 친척에게 맡겨진 James Brown은, 당시 대공황 시대에 몰려있던 경제 상황 속에서 돈을 단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며 자랍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구두 하나를 닦고 3센트를 받곤 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5센트, 6센트로 올랐지만 10센트는 꿈도 꾸지 못 했죠. 가게에 들어가 제대로 된 속옷 한 벌을 처음으로 샀을 때 전 이미 9살이었죠. 그 때까지는 포대 등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입어야 했었어요. 하지만 이미 이런 일들을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는 절대 꺾이지 않았죠.[1]“I started shining shoes at 3 cents, then went up to 5 cents, then 6 cents. I never did get up to a dime. I was 9 years old before I got a pair of underwear from a real store; all my clothes … Continue reading”라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교칙에 맞는 옷을 입지 못해 12살에 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Brown은 힘든 시기를 신앙과 음악에 의지해 버텨나갑니다. 하지만 이 와중 16살 무렵 차를 훔치려다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교도소 내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교도소 성가대를 조직하는데, 이 때 자신의 인생에 있어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될 Bobby Byrd를 만나게 됩니다.

1953년 감옥에서 출소한 Brown은 복싱과 야구 등 스포츠에 전념하다, 2년 뒤인 55년 Bobby Byrd의 제의를 수락해 그가 이끌던 그룹에 합류합니다. 아카펠라 가스펠 그룹 the Gospel Starlighters와 R&B 밴드 the Avons라는 두 아이덴티티를 지닌 그룹 속에서 Brown의 재능과 쇼맨십은 순식간에 그룹을 장악했고, the Famous Flames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Macon 지역의 클럽 등지에서 공연을 이어나갑니다. King Records에 보낸 데모 테이프 Please, Please, Please는 즉각적인 반응을 얻어 음반 계약에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R&B 차트 6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여세를 몰아 B.B. King이나 Ray Charles 같은 저명한 아티스트들의 오프닝 공연을 맡으며 승승가도를 달리는 듯 했지만 정작 Please, Please, Please를 뛰어넘을 성공을 이루지 못 하자 Brown은 58년 New York으로 발걸음을 옮겨 새로운 시작을 도모합니다. 이윽고 발표한 Try Me는 R&B 차트 1위에 입성하며 그의 음악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발돋움하게 했고 화려한 쇼맨십, 놀라운 춤 솜씨와 소울풀한 가창력은 끊이지 않는 투어로 이어져 일주일에 5, 6일 저녁을 공연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the mashed potato나 the camel walk, the popcorn 등의 파티 댄스 등에 더해 자신만의 춤을 선보이던 그는 당시 미국 쇼 비지니스에서 가장 바쁜 사람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1962년 10월 24일 New York의 Harlem에 위치한 Apollo Theater에서의 공연 실황 앨범 Live at the Apollo는 앨범 차트 2위에 오르고 무려 14개월동안 차트에 머무르며 그의 유명세를 실감하게 했습니다. The Flames의 역동적인 가스펠 보이스와 잘 다듬어진 구성, 그리고 James Brown의 무대 장악력은 라이브 콘서트 필름 the T.A.M.I. Show의 성공과 함께 미국 전역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도 그의 창작 활동은 계속되는데, 그의 밴드 the Flames와는 다른 주체의 James Brown Orchestra나 James Brown Band 등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는가 하면 I Got You (I Feel Good), It’s a Man’s World 등의 명곡을 발표하기도 했고, 특히 Papa’s Got a Brand New Bag은 독특한 리듬과 악기의 사용이 주목받아, funk 음악의 시초라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Brown은 이 곡으로 첫 번째 Grammy 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본격적으로 funk 음악의 길로 접어든 Cold Sweat부터는 훗날 힙합 음악에서 가장 많이 샘플링 된 아티스트로 James Brown을 꼽게 만드는 Give It Up or Turn It Loose, Funky Drummer, Mother Popcorn 등의 곡들을 발표하며, Soul Brother No. 1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King of Soul은 Solomon Burke가 이미 가져간 뒤).

James Brown - Live at the Apollo (1962)

James Brown – Live at the Apollo (1962)

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Brown은 사회 활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암살 다음날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그는 Boston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방송에 내보냄으로써 해당 지역에서의 폭동을 사전에 막고자 했고, 그 시도는 성공을 거둡니다. 몇 달 후, Brown은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70년대에도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아, 밴드 the J.B.’s를 결성해 Sex Machine과 Get Up Offa That Thing 등의 명곡을 발표하고, 본인의 설립한 People 레이블을 통해 Bobby Byrd의 I Know You Got Soul, Lyn Collins의 Think, Fred Wesley & the J.B.’s의 Doing It to the Death 등을 프로듀싱하지만, 72년 미국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 재선의 지지 의사를 밝히자 수많은 팬들이 등을 돌리고 보이콧을 해 해외 활동에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하는 등 재정적 문제와 더불어 disco의 등장으로 잠시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곧 73년작 영화 Black Ceasar와 Slaughter’s Big Rip-Off에 음악을 제공하며 지금 가장 잘 알려진 별명 the Godfather of Soul을 얻게 되고, 74년에 The Payback, My Thang, Papa Don’t Take Mess 등의 곡을 차트 1위에 올리며 화려하게 돌아옵니다. 영화 The Blues Brothers(1980)에도 출연하고, Rocky IV(1985)의 수록곡 Living in America는 당시 그에게 최고의 히트곡으로 사랑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공은 그를 1986년 락앤롤 명예의 전당(Rock & Roll Hall of Fame)의 최초 입성자 중 한 명으로 만들어주지만, 이 즈음 마약 중독과 우울증을 보이게 됩니다. 결국 88년에는 LSD류 마약의 하나인 PCP(Phencyclidine; angel dust)에 취해 경찰 차량과 30분 가량의 추격전을 벌이고 91년까지 15개월 가량 감옥살이를 지냅니다. 감옥에서 나온 Brown은 전성기 때의 스케줄에는 못 미치더라도 투어를 다시 시작했고, 여전히 인상적이고 역동적인 무대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추격전을 벌여 90일간의 마약 중독 재활 프로그램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Brown은 개인 투어와 더불어 각종 행사와 스포츠 무대에 오르기도 합니다. WWF(현 WWE)와 자웅을 겨루던 프로레슬링 단체 WCW의 PPV 이벤트 SuperBrawl 2000에 깜짝 출연하기도 하고, 2001년 NBA 올스타전에도 등장하며, 성룡 주연의 영화 턱시도(The Tuxedo, 2002)에 카메오로 나오기도 한 바 있습니다.

관에 뉘여진 James Brown과 그를 찾아온 Michael Jackson

관에 뉘여진 James Brown과 그를 찾아온 Michael Jackson

200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James Brown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소울의 대부(the godfather of soul), 펑크의 아버지(father of funk), 힙합의 할아버지(the grandfather of hip-hop) 등의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시대적 상황에 흑인 음악을 무기로 맞서 싸웠고, 이윽고 문화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 자신도 이러한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James Brown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궁금해하면, 전 항상 이렇게 말해요. 제 음악을 들으면 된다고.[2]“As I always said, if people wanted to know who James Brown is, all they have to do is listen to my music.”

Chadwick Boseman 주연의 James Brown 추모 영화 Get On Up (2014)

Chadwick Boseman 주연의 James Brown 추모 영화 Get On Up (2014)

그를 기억하는 이들을 위해, Chadwick Boseman 주연의 전기적 영화 Get On Up(한국 개봉명: 제임스 브라운)이 2014년에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James Brown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각주

각주
1 “I started shining shoes at 3 cents, then went up to 5 cents, then 6 cents. I never did get up to a dime. I was 9 years old before I got a pair of underwear from a real store; all my clothes were made from sacks and things like that. But I knew I had to make it. I had the determination to go on, and my determination was to be somebody.”
2 “As I always said, if people wanted to know who James Brown is, all they have to do is listen to my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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